PM과의 갈등, 범위 협의에서 영업이 져야 하는 순간들

PM과의 갈등, 범위 협의에서 영업이 져야 하는 순간들

PM과의 갈등, 범위 협의에서 영업이 져야 하는 순간들

오후 3시, 예정된 갈등

오늘도 PM이랑 미팅이다. 오후 3시. 정확히 약속된 시간. 이 시간이 오면 항상 피곤하다.

회의실 들어가기 전부터 안다. 오늘도 ‘범위’로 싸울 거라는 걸. 15년 하면서 수백 번 겪었다.

PM 김차장이 이미 앉아있다. 노트북 펴놓고 엑셀 띄워놨다. 표정이 굳어있다. 시작도 안 했는데.

“부장님, 이번 건 좀 문제가 있습니다.”

시작했다.

범위라는 이름의 지뢰밭

김차장이 화면을 돌린다. 엑셀 시트가 빨간색 투성이다. “이 기능들, RFP에 명시 안 됐습니다.”

알고 있다. 영업할 때 ‘이 정도는 당연히’라고 했던 것들. 고객사가 ‘기본 아닌가요?‘라고 했던 것들.

“API 연동 3개 추가입니다.” “대시보드 커스터마이징 5종입니다.” “모바일 최적화는 아예 범위 밖입니다.”

하나씩 짚는다. 나는 듣는다. 말이 안 나온다.

“이거 하려면 투입 인력 2명 더 필요합니다.” “기간도 1.5개월 늘어납니다.” “추가 비용 1억 2천입니다.”

1억 2천. 마진 다 까먹는 금액이다. 아니, 적자다.

“고객사한테 말씀하셔야 합니다.”

김차장이 말한다. 당연한 소리다. 근데 당연한 게 안 된다는 게 문제다.

영업이 만든 구멍, PM이 메운다

이 상황 만든 건 나다. 정확히는 우리 영업팀이다. 수주할 때 ‘다 됩니다’ 했다.

고객사 이전무가 물었다. “모바일도 당연히 되죠?” “커스터마이징 자유롭죠?”

나는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저희가 다 해드립니다.”

그때는 몰랐다? 아니다. 알았다. 근데 수주가 급했다.

경쟁사가 2개 더 있었다. 단가 경쟁도 치열했다. 여기서 ‘안 됩니다’하면 탈락이다.

그래서 했다. ‘나중에 어떻게든 되겠지.’ 15년 하면서 늘 그랬으니까.

근데 김차장은 다르다. 요즘 PM들은 다르다. 범위 벗어나면 칼같이 자른다.

“부장님, 저희도 실적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 마진율 3% 나올까 말까입니다.” “적자 프로젝트 하라는 건 아니잖습니까.”

맞는 말이다. 전부 맞는 말이다. 근데 고객사는 안 그렇게 생각한다.

고객사는 ‘당연’이라고 생각한다

전화가 온다. 고객사 이전무다. 타이밍이 기가 막히다.

“김부장님, 다음 주 리뷰 준비됐죠?” “모바일 버전 시연 기대됩니다.” “우리 임원들한테 자랑 좀 해야죠.”

시연. 모바일은 범위도 안 들어갔다. 근데 이전무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제안서에 모바일 최적화 언급하셨잖아요.” 맞다. 언급했다. ‘향후 모바일 확장 가능’이라고.

근데 그건 옵션이었다. 기본 범위가 아니었다. 하지만 고객사는 그렇게 안 읽었다.

전화 끊는다. 김차장이 본다. 말 안 해도 안다.

“고객사가 원한다고 하셨죠?”

안 하면 프로젝트가 터진다. 터지면 영업 책임이다. ‘범위 관리 못 했다’고 찍힌다.

하면 PM팀이 죽는다. 야근 2달 각이다. 마진은 마이너스다.

둘 다 지옥이다. 근데 선택해야 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협상이 아닌 설득의 시간

“김차장, 일단 듣자.”

나는 말한다. PM 입장도 이해한다. 근데 큰 그림을 봐야 한다.

“이 고객사가 누군지 알지?” “금융권 빅5 중 하나다.” “이번 프로젝트 레퍼런스 하나면 내년 수주 3건 더 있다.”

김차장 표정이 안 풀린다. 당연하다. PM한테는 ‘지금’ 프로젝트가 전부니까.

“내년 프로젝트는 제대로 견적 받겠습니다.” “이번 건은 전략적 투자로 갑시다.” “마진 안 나도 레퍼런스 값어치가 있습니다.”

전략적 투자. 영업이 자주 쓰는 말이다. PM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기도 하다.

“부장님, 작년에도 그러셨습니다.” “재작년에도 전략적 투자였습니다.” “전략적 투자만 5개째입니다.”

할 말이 없다. 사실이니까. 매번 ‘이번만’이라고 했다.

“이번엔 진짜 다르다.” “고객사 IT예산 내년에 30% 늘어난다.” “우리가 먼저 들어가야 한다.”

김차장이 한숨 쉰다. 포기하는 한숨이다. 져주는 한숨이다.

“조건 있습니다.”

PM이 제시하는 최소한의 선

김차장이 노트북을 다시 연다. 새 시트를 띄운다. 협상안이다.

“모바일은 1차 출시 때 빼겠습니다.” “2차 업그레이드 때 넣는 걸로 하죠.” “고객사한테 ‘단계적 구축’이라고 설득하세요.”

단계적 구축. 좋은 말이다. 실제론 ‘지금은 못 한다’는 뜻이지만.

“API 연동은 2개만 하겠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고객사가 자체 개발하거나.” “아니면 추가 계약 따로 하세요.”

추가 계약. 고객사가 받아들일까. 어렵다. 근데 방법이 없다.

“대시보드 커스터마이징은 3종으로 줄이겠습니다.” “템플릿 기반으로 하면 공수 반으로 줍니다.” “대신 고객사가 직접 수정 가능하게 툴 드리죠.”

하나씩 깎는다. PM 입장에서 최소한이다. 이것도 야근 각인데.

“이렇게 해도 추가 공수 1.2억입니다.” “회사가 먹겠습니까, 고객사가 먹겠습니까?”

둘 다 안 먹는다. 결국 PM팀이 먹는다. 나도 안다. 김차장도 안다.

“내가 본부장님한테 말씀드린다.” “특별 예산 좀 받아볼게.” “그리고 고객사한테는 내가 설득한다.”

김차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믿는 건 아니다. 그냥 선택지가 없어서다.

영업의 숙제, 불가능의 영역

회의 끝났다. 김차장이 나간다. 나는 회의실에 남는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고객사 설득. 내부 예산 확보.

먼저 이전무한테 전화한다. “전무님, 리뷰 일정 관련해서요.” “단계적 구축 방안 좀 협의하고 싶습니다.”

단계적. 1차, 2차 나눠서. 모바일은 나중에.

“왜요? 문제 있어요?” 바로 눈치챈다. 15년 고객사 관리한 사람이다.

“아닙니다. 더 완성도 높이려고요.” “1차는 코어 기능에 집중하고.” “2차에서 확장 기능 완벽하게 하는 거죠.”

거짓말은 아니다. 포장한 것뿐이다. 영업은 이런 거다.

“흠… 임원들한테 뭐라고 하죠?” 이게 핵심이다. 이전무 고민은 상사 보고다.

“대시보드 3종 먼저 보여드리시면 됩니다.” “모바일은 UX 고도화 중이라고 하시고요.” “2차 때 완벽한 버전 보여드리는 게 낫습니다.”

이전무가 잠시 침묵한다. 계산하는 침묵이다. 본인 리스크 계산.

“좋습니다. 그럼 2차는 언제죠?” “3개월 후 가능합니까?”

3개월. 김차장이랑 다시 싸워야 한다. 근데 일단 넘어갔다.

“검토해보고 일정 드리겠습니다.” 전화 끊는다. 첫 번째 고비 넘었다.

이제 본부장님이다. 1억 2천 예산 받아야 한다. 이게 더 어렵다.

내부 보고, 또 다른 전쟁

본부장 방 앞이다. 노크한다. “들어오세요.”

본부장님이 모니터 보고 있다. 실적 대시보드다. 우리 팀 수치가 보인다.

“무슨 일이에요?”

앉는다. 보고 시작한다.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A은행 프로젝트 범위 이슈입니다.” “PM팀 검토 결과 추가 공수 발생했습니다.” “1억 2천 수준입니다.”

본부장님 표정이 굳는다. 예상했다. 숫자 나오면 다들 그렇다.

“왜 수주할 때 몰랐어요?”

이 질문이 제일 무섭다. 대답 없다. 변명밖에 안 된다.

“고객사 요구사항이 제안 단계에서.”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이다. 알고도 넘어간 거다. 본부장님도 안다.

“경쟁사 상황은?” “2개 업체 중 우리가 수주했죠?” “단가 경쟁 어땠어요?”

본부장님은 안다. 영업 프로세스를 안다. 단가 맞추려고 범위 줄인 거.

“치열했습니다.” “근데 이 고객사는 전략적으로.” “레퍼런스 가치가 큽니다.”

전략적. 또 이 단어다. 본부장님이 웃는다. 비웃는 거다.

“김부장, 올해 전략적 프로젝트가 몇 개죠?” “작년에도 전략적이었고.” “매년 전략적이면 그게 전략인가요?”

할 말 없다. 정곡이다. 근데 선택지가 없다.

“내년 A은행 예산 30% 증가합니다.” “차세대 2단계 예정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레퍼런스 만들면.” “200억 프로젝트 선점 가능합니다.”

200억. 이 숫자가 중요하다. 본부장님 표정이 바뀐다.

“확실해요?” “A은행 IT담당 임원이 확답했어요?”

확답. 그런 거 없다. 다 추측이다.

“아직 공식 확답은.” “근데 이전무 통해서 들었습니다.” “임원들이 차세대 2단계 준비 중입니다.”

본부장님이 생각한다. 길게 생각한다. 이게 영업 판단이다.

“1억 2천, 우리가 먹는 겁니까?” “고객사한테 추가 받을 수 있습니까?”

둘 다 아니다. PM팀이 먹는다. 야근으로, 주말 근무로.

“일단 우리가 흡수하겠습니다.” “2차 업그레이드 때 비용 받는 걸로.” “고객사 설득 중입니다.”

본부장님이 한숨 쉰다. 승인하는 한숨이다. 근데 조건이 붙는다.

“이번만입니다.” “내년 A은행 프로젝트 못 따오면.” “김부장, 책임집니다.”

책임. 무슨 책임인지 안다. 인사고과, 승진, 최악은 팀 이동.

“알겠습니다.”

나온다. 본부장 방 나온다. 복도가 길다.

져야 이기는 게임

사무실로 돌아온다. 김차장한테 메시지 보낸다. “예산 확보했습니다. 진행하시죠.”

답장 온다. “확인했습니다.” 느낌표 하나 없다.

기쁘지 않다. 당연하다. PM팀 야근 2달 확정이니까.

내 책임이다. 영업이 판 구멍. PM이 메운다.

15년 하면서 늘 이랬다. ‘이번만’이라고 하면서. 매년 반복했다.

김차장 같은 PM 몇 명 태웠다. 다들 지쳐서 나갔다. 다른 회사로, 다른 업종으로.

‘영업이 왜 이래요?’ ‘수주만 하면 끝입니까?’ ‘저희가 청소부입니까?’

다 들었다. 반박 못 했다. 사실이니까.

근데 이게 SI다. 수주 못 하면 회사가 없다. 프로젝트 없으면 다 백수다.

범위 지키면 수주 못 한다. 경쟁사가 ‘다 된다’고 하니까. 고객사는 그쪽 선택한다.

그럼 우리도 ‘다 된다’고 한다. 수주하고 나중에 해결한다. PM팀 설득하고, 본부장 설득하고.

이게 영업이다. 져야 이기는 게임. PM한테 지고, 본부장한테 지고.

근데 고객사한테는 이긴다. 프로젝트 따온다. 회사는 돌아간다.

오후 6시, 다음 전쟁 준비

시계 본다. 오후 6시. 3시간 싸웠다.

메일 확인한다. 새 RFP 왔다. B증권, 200억 규모.

열어본다. 요구사항 쭉 본다. 벌써 보인다.

‘이거 범위 애매하네.’ ‘나중에 문제 되겠네.’ ‘PM이랑 또 싸우겠네.’

근데 해야 한다. 안 하면 경쟁사가 한다. 그럼 우리 실적 없다.

전화 온다. PM 박과장이다. 신규 프로젝트 담당자.

“부장님, B증권 건 보셨죠?” “범위 검토 좀 하고 싶은데요.” “내일 미팅 가능하십니까?”

또 시작이다. 범위 협의. 영업과 PM의 전쟁.

“그래요, 내일 10시.”

전화 끊는다. 내일도 싸운다. 모레도 싸울 거다.

이게 내 일이다. 15년 했다. 앞으로도 할 거다.

PM한테 미안하다. 근데 선택지가 없다. 이게 SI 영업이다.


져야 이기는 게임. 오늘도 졌다. 내일도 질 거다. 근데 프로젝트는 따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