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억 프로젝트 수주 실패 후 집에 가는 길, 무엇을 생각할까

수십억 프로젝트 수주 실패 후 집에 가는 길, 무엇을 생각할까

강남역에서 분당으로, 6개월이 무너지는 시간

출근했다. 아침 9시. 김포공항 금융권 차세대 시스템 프로젝트 최종 발표 날이다. 6개월간 준비했다. 아키텍트 3명, PM 2명, 컨설턴트 5명. 제안서만 800쪽. 마진율 12%. 예상 수주가 68억원.

오후 2시, CTO 면접. 우리 솔루션이 좋다. 충분히 좋다. 경쟁사는 단가가 53억원이래. 뭐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가격이다.

오후 4시 30분, 최종 수주 결정 내려진다고 했다.


차 안이다. 강남역 빠져나와 분당 방향으로 간다. 오후 5시 45분. CTO한테서 전화 왔었다. “죄송하지만 경쟁사로 진행하기로…”

음. 그렇지.

핸들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린다. 신호 대기다. 옆에 누가 보는 건 아니니까 표정 가릴 필요는 없다.


생각은 빠르게 돈다

뭐가 잘못됐지.

CTO 니즈를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다. 작년부터 만났다. 회의만 12번. 아내랑 골프 한 번 갔다. 스콘 차 마시면서 비즈니스 모델 설명했다.

아키텍트 의견도 좋았다. “기술 스택은 우리가 앞선다”고.

근데 뭐. 가격이다. 63억원 vs 53억원. 10억원 차이.

회사에서는 8% 이상 마진 못 내면 수주 승인 안 나는 거다. 12%로 제안했다. 경쟁사는 4% 마진도 감당할 수 있나. 그러면 손실 남다.

경쟁사가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덤핑이다. 무조건 덤핑이다.

그런데 고객사는 신경 안 쓴다. 가격이 낮으면 된다. 차세대 시스템이 언제까지 운영될지 모르니까 당장 예산절감이 중요한 거다.

이 짓을 15년을 했다.

강남구청역 지나간다. 차 많다. 모두 퇴근길이다.


자책은 빠르고, 분석은 더 빠르다

내가 뭘 놓쳤나.

CTO는 기술 의사결정권이 있는 사람이다. 근데 CFO가 최종 결정권이다. CFO를 한 번도 안 만났다.

이게 실수다.

임원진 구조를 꿰뚫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금융사는 복잡하다. CTO가 좋다고 해도 CFO가 “가격 높네”라고 하면 끝이다.

경쟁사는 CFO를 만났나보다. CFO 담당 영업이 있나.

조사 안 했다. 경쟁사 인원 구성을 좀 더 자세히 봤어야 했다.

아 그리고 김포공항 금융 담당 이사. 그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 “차세대 시스템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이다”라고 했었는데. 그 사람을 더 깊게 설득 못 했다.

“생존”이면 기술이 중요한 거고. 기술이 중요하면 가격이 아니라 안정성이 우선이어야 하는데. 뭐 하는 건지 모르겠는 가격에서 진행하려니까.

CEO가 결정했을 거다. 예산 압박이 있었나.


분당 영통 IC 들어간다. 집까지 15분.

지난 6개월을 떠올린다.

1월. 기술 검증. 2월. 김포공항 금융 이사한테 첫 만남. 3월. CTO 미팅 3번. 4월. 제안서 첫 초안. 밤새 수정했다. PM이 뭐가 이렇냐고 물었다. 5월. 고객사 내부 검증. 우리 파트너사 컨설턴트 5명 투입했다. 아키텍트는 3주간 현장에서 설계 검증만 했다. 6월. 최종 제안. 프리젠테이션 리허설만 3번.

근데 뭐. 끝이다.


회사에 어떻게 설명하지

내일 아침. 영업본부장 보고가 있다.

“경쟁사에 밀렸습니다.”

그게 다다.

이사는 뭐라고 할까.

“마진율 때문에 손 뺐나?” “경쟁사 단가를 알고도 68억 제안했나?” “김포공항 금융 이사 라인은 충분히 공략했나?”

알겠다고 대답할 거다. 그리고 다음 프로젝트 이야기가 나온다.

“다음 분기 파이프라인 상황은?”

또 다른 제안서 준비해야 한다.



근데 이건 처음이 아니다

2018년. 은행권 코어 뱅킹 시스템. 8개월 준비했다. 최종 단계에서 경쟁사에 밀렸다. 그때도 가격이었다.

2015년. 증권사 차세대 트레이딩 플랫폼. 기술은 우리가 맞았다. 근데 고객사 정치에 휘말렸다. CTO가 바뀌면서 경쟁사 선호로. 62억원 프로젝트. 그때도 실패했다.

그런데 그 다음엔?

2016년. 다른 은행 차세대 시스템. 그건 성공했다. 120억원. 18개월 프로젝트였다.

실패는 있고, 성공도 있다.

그게 영업이다.

근데 15년을 하면서 느끼는 건. 요즘은 성공할 확률이 예전보다 낮다는 거다.

2010년대는 차세대 시스템이 많았다. 은행들이 다 바꿨다. 레거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떼를 썼다.

2020년대는 뭔가 다르다.

클라우드다. DX다. AI다. 근데 예산은 줄었다. “굳이 새로 구축해야 하나?”라는 질문이 늘었다.

그리고 경쟁사도 많아졌다. 해외 회사들도 들어왔다. 스타트업들도 있다.

우리는 여전히 큰 SI 회사다. 5000명 직원. 근데 시장은 작아진다.


분당 신분당선 역 근처다. 신호 또 기다린다.

아내한테 전화할까.

아니다. 아직 집 안 들어갔다. 집에서 말할 거다.

“프로젝트 떨어졌어.”

아내는 “그래, 다음 거 있지?”라고 할 거다. 딸한테는 안 말할 거다. 아들한테도.

근데 하루 이틀 지나면 느낄 거다. 아빠의 기분이 안 좋다는 걸.


다음 전략

근데 이건 어쨌든 예상했던 결과다.

가격이 10억 차이 나는데 이길 거 있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 왜 제안했나.

기회라고 생각했다. CTO가 우호적이었다. 기술 검증이 좋았다.

“이번엔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아니었다.

이번엔 내가 피할 수 없는 변수가 있었다.

경쟁사의 가격 전략. 고객사의 예산 제약. 임원진 구조에서 CFO의 영향력.

이 세 개는 내가 통제할 수 없다.

그럼 다음부턴?

CFO를 먼저 만나는 거다.

“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CFO에게 설득하는 거다.

기술이 아니라 “비용 효율성”으로. “초기 투자는 조금 많지만 장기 운영 비용이 줄어든다”는 식으로.

근데 이것도 이미 제안서에 들어가 있었다.

그럼?

그럼 경쟁사 가격 정보를 먼저 캐치하는 수밖에 없다.

고객사 담당자한테는 무섭게 물어볼 수 없다.

근데 우리 컨설턴트라면?

“경쟁사 생각은 어떻게 봐?”

물어볼 수 있다.



회사는 내일도 돈다

퇴근하고 생각할 시간은 여기까지.

집 들어가면 아내가 저녁 준비했을 거다. 딸은 숙제 한다고 할 거고. 아들은 게임 한다고 할 거다.

평범한 목요일 밤이다.

내일은 또 다른 미팅이다.

오전 10시. 증권사 임원진 미팅. “차세대 투자 시스템 검토 단계”라고 했다.

또 제안할 거다. 또 경쟁사 있을 거다.

15년은 이런 식이었다.

한 번 떨어지고, 한 번 따고.

근데 떨어지는 게 늘어난다.

시장이 줄어드니까.


분당 집 도착했다. 오후 8시 20분.

차에서 내린다.

핸드폰을 본다.

카톡 6개.

[영업본부장] “결과 어떻게 됐나”

아직 9시 보고 안 했는데 벌써 알았나.

CTO가 이사한테 먼저 연락했을 거다.

“죄송하지만 다른 업체로 진행하겠습니다”

이사가 우리 CEO한테 알렸을 거다.

CEO가 부장한테 알렸을 거다.

부장이 나한테.

아직 나는 답 안 해도 다들 알고 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탄다.

13층.

내일 아침 회의에서 뭐라고 할지 생각한다.

“내부 검토 부족했습니다.” “경쟁사 가격 정보 수집 미흡했습니다.” “CFO 라인 미공략.”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리고.

“다음 분기에는 초기 접근 단계에서 의사결정 구조를 더 정밀하게 파악하겠습니다.”

이 한 마디면 된다.


문 열고 들어선다.

“아빠 왔어?”

아들 목소리다.

“응. 아빠 왔다.”

아내가 반찬 덜고 있다.

“밥 뜨겠어?”

“응.”

밥 먹자.

내일 또 다른 제안 전략 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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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안에서 생각한 것들은 다음날 실행된다. 근데 그 전에 밥은 먹어야 한다. 차세대 시스템 수주든 뭐든, 내일 아침도 9시에 출근해야 한다. 경쟁사에 진 이유를 분석하는 게 중요하지만, 그건 차세대 프로젝트다. 지금은 내일 고객사 미팅 자료만 정리하면 된다. SI 시장이 줄어드는 건 맞다. 근데 적어도 내일은 기회가 하나 더 있다. 그게 영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