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서 최종 검토 때 밤 11시, 아직도 틀린 부분을 찾는 이유
- 07 Dec, 2025
제안서 최종 검토 때 밤 11시, 아직도 틀린 부분을 찾는 이유
11시 23분
사무실에 나랑 PM 한 명만 남았다.
나머지는 다 보냈다. 내일 아침에 최종본 출력하면 된다고.
근데 나는 못 간다.
제안서를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 세 번째다.
370페이지. A4 용지로 치면 500장 넘는다.

커피 식었다. 마신다. 쓰다.
PM이 묻는다. “부장님, 괜찮으시죠?”
괜찮을 리가 없다.
이 제안서 금액이 850억이다.
작년 11월
작년에 비슷한 프로젝트 수주했다.
680억짜리. 우리가 땄다.
제안서 제출하고 발표까지 완벽했다.
근데 계약서 검토 단계에서 터졌다.
제안서에 명시된 투입 인력 수가 우리 원가 계산서랑 안 맞았다.
제안서: 180명 원가표: 165명
15명 차이.
고객사에서 지적했다. “제안서대로 180명 투입하시죠?”
우리는 165명 기준으로 단가 뽑았다.
180명으로 하면 마진이 3% 날아간다.
20억 손해.
결국 우리가 손해 보고 계약했다.
그때 제안서 총괄한 게 나였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앉아 있다.
12시 18분
2장. 프로젝트 개요.
“고객사의 디지털 혁신을 통한…”
문제없다.
5장. 사업 범위.
“총 18개 서브시스템 재구축…”
숫자 확인한다. 별첨 A랑 대조한다.
맞다.
23장. 투입 인력 계획.
여기다. 여기서 실수 나온다.

PM 급 12명. 확인. 선임급 45명. 확인. 중급 78명. 확인. 초급 34명. 확인.
합계 169명.
원가표 꺼낸다.
169명. 맞다.
근데 믿을 수가 없다.
다시 센다. 표를 하나하나.
12 + 45 + 78 + 34 = 169명.
맞다.
그래도 불안하다.
1시 05분
PM이 졸고 있다.
깨운다. “미안한데, 34페이지 인력 투입 일정표 좀 봐.”
“네? 아 네.”
같이 확인한다.
1단계: 67명 2단계: 102명 3단계: 89명 4단계: 45명
최대 투입 인력이 102명이다.
총 투입 인력 169명이랑 다른 개념이다.
근데 고객사는 이거 헷갈려한다.
작년에도 이거 때문에 한 번 싸웠다.
“제안서에 169명이라고 했는데 왜 102명만 들어왔냐”고.
설명했다. 중복 계산 아니라고. 단계별 최대 투입 인력이라고.
이해 못 한다.
그래서 이번엔 주석 달았다.
”* 총 투입 인력(169명)은 전체 사업 기간 동안의 누적 인력이며, 단계별 최대 투입 인력(102명)과는 상이함”
이 한 줄 때문에 30분 썼다.
근데 이 한 줄이 20억을 지킨다.
1시 47분
67페이지. 기술 아키텍처.
여기는 아키텍트가 쓴 부분이다.
나는 기술 잘 모른다. 15년 영업했다.
근데 읽는다.
“Microservices Architecture 기반…” “Kubernetes Orchestration…” “API Gateway 구성…”
무슨 소린지 모른다.
근데 읽는다.
왜냐면 고객사 CIO가 물어보기 때문이다.
“이 부분 좀 설명해주실래요?”
그때 내가 대답 못 하면 신뢰 깨진다.

그래서 지금 외운다.
Microservices는 시스템을 작게 쪼갠 거다. Kubernetes는 그걸 관리하는 거다. API Gateway는… 뭐 중간에서 교통정리하는 거다.
대충 이 정도면 CIO 질문에 버틴다.
디테일은 옆에 아키텍트가 설명한다.
근데 나는 흐름은 알아야 한다.
2시 20분
PM 완전히 잤다.
깨우지 않는다. 얘는 내일 새벽에 제안서 출력해야 한다.
나 혼자 읽는다.
158페이지. 사업 수행 일정.
간트 차트가 있다.
24개월. 1단계부터 4단계까지.
여기서 고객사가 집중하는 건 중간 산출물이다.
“3개월 차에 뭐 나오죠?” “6개월 차엔요?”
제안서에 다 써놨다.
근데 이게 우리 내부 PM 계획이랑 맞아야 한다.
안 맞으면 나중에 지옥이다.
고객사: “제안서에 3개월 차에 분석 보고서 준다고 했잖아요.” 우리: “아 그게… 일정이…”
이러면 끝이다.
그래서 확인한다.
제안서 일정표 - PM 내부 계획서 - 원가 산정 기준
세 개가 다 맞아야 한다.
하나씩 대조한다.
맞다. 다행이다.
근데 안심 안 된다.
2시 55분
이제 부록이다.
회사 소개, 유사 실적, 기술 인증서, 참여 인력 이력서.
여기는 보통 안 본다.
근데 나는 본다.
작년에 여기서도 실수 났다.
참여 인력 이력서에 PM으로 들어간 사람.
실제로는 그 프로젝트 못 한다. 다른 프로젝트 투입됐다.
근데 제안서엔 이름 올라갔다.
고객사가 킥오프 미팅 때 물었다.
“김 상무님은 언제 오시나요?”
”…김 상무는 다른 프로젝트가 있어서…”
신뢰 무너졌다.
그 프로젝트 3개월 동안 난리였다.
그래서 지금 확인한다.
참여 인력 12명. 한 명씩 확인한다.
인사팀한테 받은 투입 가능 인력 리스트랑 대조한다.
다 맞다.
근데 또 불안하다.
내일 아침에 인사팀한테 전화한다. 한 번 더 확인한다.
3시 10분
다 봤다.
370페이지. 3시간 걸렸다.
오류 발견 못 했다.
다행이다.
아니다. 불안하다.
내가 못 찾은 걸 수도 있다.
커피 한 잔 더 탄다.
PM 깬다. “야, 일어나. 같이 한 번만 더 보자.”
“네? 부장님 다 보신 거 아니에요?”
“나 혼자 보면 안 돼. 너도 봐야 돼.”
”…네.”
둘이서 또 본다.
핵심 부분만. 인력, 일정, 금액.
30분 걸렸다.
문제없다.
“간다. 너도 가.”
“네. 고생하셨습니다.”
PM 먼저 보낸다.
나는 제안서 파일을 USB에 복사한다.
메일로도 나한테 보낸다.
출력본이 문제 생기면 이걸로 다시 뽑는다.
3시 40분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차에 탄다.
시동 건다.
집까지 40분.
4시 반에 도착한다.
7시에 다시 나와야 한다.
2시간 반 잘 수 있다.
근데 못 잔다. 알람 맞춰놔도 30분마다 깬다.
제안서 생각 때문에.
“혹시 뭐 빠뜨린 거 없나” “숫자 계산 틀린 거 없나” “고객사 질문에 답 못 하면 어쩌나”
이게 15년째다.
왜 이러나
850억이다.
우리 회사 올해 목표가 3500억이다.
이 프로젝트 하나가 4분의 1이다.
이거 날아가면 우리 본부 실적 끝이다.
내 인센티브도 끝이다.
근데 그것보다.
제안서 하나 잘못 써서 프로젝트 날리면.
15년 쌓은 신뢰가 한 번에 무너진다.
“SI영업부 박 부장? 아, 그 사람 제안서 엉망으로 써서…”
이렇게 소문난다.
금융권 좁다. 다 안다.
그럼 다음 프로젝트도 못 딴다.
그래서 본다. 밤 11시에도. 새벽 3시에도.
제안서 한 글자 한 글자.
숫자 하나하나.
이게 내 15년이다.
내일 아침 8시, 제안서 제출한다. 그때까지는 못 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