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사 정치에서 뒈진다는 것, 수주 경험으로 배운 것들
- 04 Dec, 2025
고객사 정치에서 뒈진다는 것, 수주 경험으로 배운 것들
280억짜리 프로젝트가 증발하는 순간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2024년 3월이었다.
A금융 차세대 시스템 구축. 280억. 8개월 제안 준비. 우리가 우선협상대상자.
CIO가 말했다. “프로젝트 잠시 보류합니다.”
그게 끝이었다.
복도에서 만난 IT담당 임원이 작게 말했다. “부행장님이 반대하셔서요. CIO님이랑 경영 방향 달라서.”
280억이 그렇게 날아갔다. 8개월이 허공으로.

고객사 정치라는 게임
SI 영업 15년 하면서 배운 거. 기술은 20%, 정치가 80%.
아무리 좋은 제안서도 임원진이 싸우면 끝이다.
경우의 수는 이렇다:
CIO가 추진하는데 CFO가 반대: 예산 타당성 문제 제기. 프로젝트 6개월 지연 또는 축소.
CIO가 추진하는데 업무부서 임원이 반대: 현업 니즈 반영 안 됐다고 회의 때마다 딴지. 결국 재검토.
CIO가 추진하는데 부행장급이 다른 방향 원함: 프로젝트 자체가 보류되거나 방향 180도 전환.
우리는? 그냥 외부 업체일 뿐.
누구 편 들면 나머지한테 찍힌다. 중립 지키려면 양쪽 다 불만족. 프로젝트는 표류.
첫 번째 실수: CIO 편만 든 거
2019년이었다. B은행 디지털 전환 프로젝트.
CIO가 강력하게 추진했다. “클라우드 전면 전환합니다.”
우리는 CIO 라인하고만 소통했다. 제안서도 CIO 의견 100% 반영.
그런데 IT기획팀장이 귀띔했다. “부행장님은 온프레미스 유지 원하세요.”
나는 무시했다. CIO가 의사결정권자잖아.
결과? 경영회의에서 부행장이 반대. “클라우드 보안 검증 안 됐다.”
프로젝트 무산. CIO는 3개월 뒤 자리에서 물러났다.
우리는? 그 은행에서 2년간 프로젝트 못 땄다.
부행장 라인 사람들이 다 기억하더라. “저 회사, CIO만 보는 애들이야.”
두 번째 실수: 양쪽 다 맞춰주려다 망한 거
2021년. C카드사 차세대.
이번엔 교훈 얻어서 양쪽 다 챙겼다. CIO한테도 보고, CFO한테도 보고.
제안서에 CIO 원하는 최신 기술 넣고, CFO 원하는 비용절감안도 넣었다.
그런데 두 분이 원하는 게 정반대였다.
CIO: “마이크로서비스 아키텍처로 전면 개편” CFO: “레거시 최대한 활용해서 비용 절감”
우리 제안서는 애매한 중간안이 됐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발표 때 CIO가 물었다. “이거 제대로 된 혁신 맞나요?” CFO가 물었다. “이 비용으로 효과가 나올까요?”
둘 다 못 만족시켰다. 경쟁사가 수주했다. 걔들은 CIO 쪽으로 명확하게 갔다.
세 번째 프로젝트에서 배운 것
2022년 가을. D증권 DX 프로젝트.
이번엔 달랐다.
첫 미팅 때부터 물었다. “이 프로젝트, 경영진 합의 어느 정도세요?”
IT담당 임원이 솔직하게 말했다. “CIO는 추진, CFO는 유보적, 부사장은 관심 없음.”
나는 제안 전에 3주를 썼다. CFO 설득에.
CFO 만나서 물었다. “어떤 ROI 나와야 승인하시겠어요?”
구체적 숫자를 들었다. “3년 내 15% 비용절감.”
제안서에 그 숫자를 박았다. 기술 내용보다 재무적 타당성을 앞에 뺐다.
CIO한테는 따로 말했다. “기술적으론 최신으로 가되, 재무 논리 먼저 통과시키겠습니다.”
발표 순서도 바꿨다. CFO 앞에서는 비용 먼저, CIO 앞에서는 기술 먼저.
결과? 수주했다. 145억.

핵심은 “반대하는 사람”을 먼저 보는 것
15년 하면서 배운 결론.
찬성하는 사람은 신경 안 써도 된다. 어차피 찬성이니까.
반대하는 사람이 문제다. 얘가 막으면 프로젝트 없다.
그래서 나는 이제 첫 미팅 때 묻는다:
“이 프로젝트, 누가 반대하세요?” “반대하는 이유가 뭐예요?” “그분 설득하려면 뭐가 필요해요?”
담당자들은 처음엔 당황한다. 그런 걸 묻는 영업이 없으니까.
근데 솔직하게 말해준다. 얘들도 프로젝트 성사시키고 싶으니까.
작년에 E은행 프로젝트. CIO가 추진하는데 IT운영본부장이 반대했다.
이유? “구축하면 운영 인력 30명 더 필요한데 우리 팀 증원 안 해줘요.”
나는 제안서에 운영 자동화 방안 추가했다. “현재 인력으로 운영 가능한 설계.”
IT운영본부장 따로 만나서 보여줬다. “이렇게 하면 증원 없이 됩니다.”
반대가 중립으로 바뀌었다. 프로젝트 통과했다.
줄 서지 않는다는 건 이런 것
“어느 쪽에 줄 서지 않으면서 생존”
이게 가능은 하다. 근데 방법이 다르다.
줄을 안 서는 게 아니라, 양쪽 줄을 다 이해하는 거다.
CIO가 왜 추진하는지 안다. 디지털 전환 안 하면 경쟁사한테 밀린다. 임기 내 실적 필요하다.
CFO가 왜 반대하는지도 안다. 예산 압박 심하다. 투자 대비 효과 불확실하다.
나는 양쪽 논리를 다 제안서에 넣는다.
CIO한테는: “이 프로젝트로 시장 경쟁력 확보” CFO한테는: “3년 ROI 18%, 운영비 절감 연 12억”
양쪽이 다 자기 논리가 들어갔다고 느끼게.
중요한 건, 거짓말 안 하는 거다. 양쪽한테 다른 말 하면 나중에 걸린다.
같은 프로젝트인데 설명 방식만 다르게. CIO한테는 기술 혁신 강조, CFO한테는 재무 효과 강조.

그래도 뒈지는 경우
솔직히 말하면, 완벽한 방법은 없다.
임원진 싸움이 격해지면 외부 업체는 그냥 튕긴다.
작년 F저축은행. CIO랑 경영기획본부장이 완전히 대립했다.
CIO: “차세대 시스템 필수” 경영기획본부장: “지금 시스템으로 충분”
6개월 제안 준비했다. 양쪽 다 만났다. 제안서도 두 가지 시나리오로 만들었다.
결과? 프로젝트 자체가 취소됐다.
이사회에서 결론 못 내렸다. CIO는 2개월 뒤 사표 냈다.
우리는? 6개월치 인건비 날아갔다. 5명 투입했으니 약 1억.
이런 경우는 어쩔 수 없다. 초반에 알아채고 빠지는 게 답이다.
빠지는 타이밍 판단
요즘은 초반에 이거 체크한다:
“이 프로젝트, 경영진 합의 수준이 어떠세요?”
답변이 애매하면 위험신호다.
“아, 그건… 조율 중입니다.” “CIO님은 확정인데 다른 분들은…” “일단 추진하고 승인은 나중에…”
이런 답 나오면 PM한테 말한다. “제안 규모 줄여. 리스크 크다.”
풀로 투입 안 한다. 2~3명만 넣어서 가볍게 제안한다.
안 되면 빨리 손절한다. 계속 매달리면 더 큰 손해.
작년에 G카드사 프로젝트. 초반에 신호 이상했다.
담당 임원이 계속 말 바꿨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곧 결정됩니다.”
3주 기다렸는데 답 없었다. 나는 철수했다.
경쟁사 2곳은 계속했다. 결국 프로젝트 무산됐다. 걔들은 4개월 날렸다.
생존의 기술
고객사 정치에서 생존하는 법. 정리하면 이거다:
1. 반대하는 사람을 먼저 파악한다. 찬성하는 사람 말고, 반대하는 사람. 얘 설득 못 하면 프로젝트 없다.
2. 반대 이유를 구체적으로 듣는다. “왜 반대하세요?” 직접 묻는다. 담당자 통해서라도 확인한다.
3. 제안서에 반대 의견 해소 방안을 넣는다. CFO가 비용 걱정하면 ROI 박는다. 운영팀이 인력 걱정하면 자동화 넣는다.
4. 양쪽한테 같은 내용, 다른 프레임으로 설명한다. 거짓말 아니다. 같은 프로젝트를 CIO 관점, CFO 관점으로 각각 설명하는 것.
5. 정치 싸움이 격하면 빨리 빠진다. CIO가 곧 물러날 것 같으면 투입 줄인다. 프로젝트 취소될 것 같으면 손절한다.
이렇게 해도 실패한다. 50%는 실패한다.
근데 이렇게 안 하면? 80% 실패한다.
그래도 계속하는 이유
피곤하다. 기술 영업이 아니라 정치 영업.
제안서보다 사람 보는 게 더 중요하다.
밤새 제안서 쓰는데 임원 한 명이 반대하면 끝이다.
그럼 왜 하냐고?
280억짜리 프로젝트 하나 수주하면 연봉이 두 배가 된다.
실패해도 다음 프로젝트가 있다.
이 바닥에서 15년 버텼으면 이제 알만큼 안다.
완벽한 방법은 없다. 확률을 높이는 방법만 있다.
고객사 정치는 피할 수 없다. 그럼 이해하고 대응한다.
줄 서지 않는 게 아니라, 양쪽 줄을 다 이해하는 것.
그게 내가 15년간 배운 생존법이다.
280억 날렸지만 다음 프로젝트는 320억이었다. 그렇게 버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