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M과의 갈등, 범위 협의에서 영업이 져야 하는 순간들

PM과의 갈등, 범위 협의에서 영업이 져야 하는 순간들

PM과의 갈등, 범위 협의에서 영업이 져야 하는 순간들 오후 3시, 예정된 갈등 오늘도 PM이랑 미팅이다. 오후 3시. 정확히 약속된 시간. 이 시간이 오면 항상 피곤하다. 회의실 들어가기 전부터 안다. 오늘도 '범위'로 싸울 거라는 걸. 15년 하면서 수백 번 겪었다. PM 김차장이 이미 앉아있다. 노트북 펴놓고 엑셀 띄워놨다. 표정이 굳어있다. 시작도 안 했는데. "부장님, 이번 건 좀 문제가 있습니다." 시작했다.범위라는 이름의 지뢰밭 김차장이 화면을 돌린다. 엑셀 시트가 빨간색 투성이다. "이 기능들, RFP에 명시 안 됐습니다." 알고 있다. 영업할 때 '이 정도는 당연히'라고 했던 것들. 고객사가 '기본 아닌가요?'라고 했던 것들. "API 연동 3개 추가입니다." "대시보드 커스터마이징 5종입니다." "모바일 최적화는 아예 범위 밖입니다." 하나씩 짚는다. 나는 듣는다. 말이 안 나온다. "이거 하려면 투입 인력 2명 더 필요합니다." "기간도 1.5개월 늘어납니다." "추가 비용 1억 2천입니다." 1억 2천. 마진 다 까먹는 금액이다. 아니, 적자다. "고객사한테 말씀하셔야 합니다." 김차장이 말한다. 당연한 소리다. 근데 당연한 게 안 된다는 게 문제다.영업이 만든 구멍, PM이 메운다 이 상황 만든 건 나다. 정확히는 우리 영업팀이다. 수주할 때 '다 됩니다' 했다. 고객사 이전무가 물었다. "모바일도 당연히 되죠?" "커스터마이징 자유롭죠?" 나는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저희가 다 해드립니다." 그때는 몰랐다? 아니다. 알았다. 근데 수주가 급했다. 경쟁사가 2개 더 있었다. 단가 경쟁도 치열했다. 여기서 '안 됩니다'하면 탈락이다. 그래서 했다. '나중에 어떻게든 되겠지.' 15년 하면서 늘 그랬으니까. 근데 김차장은 다르다. 요즘 PM들은 다르다. 범위 벗어나면 칼같이 자른다. "부장님, 저희도 실적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 마진율 3% 나올까 말까입니다." "적자 프로젝트 하라는 건 아니잖습니까." 맞는 말이다. 전부 맞는 말이다. 근데 고객사는 안 그렇게 생각한다.고객사는 '당연'이라고 생각한다 전화가 온다. 고객사 이전무다. 타이밍이 기가 막히다. "김부장님, 다음 주 리뷰 준비됐죠?" "모바일 버전 시연 기대됩니다." "우리 임원들한테 자랑 좀 해야죠." 시연. 모바일은 범위도 안 들어갔다. 근데 이전무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제안서에 모바일 최적화 언급하셨잖아요." 맞다. 언급했다. '향후 모바일 확장 가능'이라고. 근데 그건 옵션이었다. 기본 범위가 아니었다. 하지만 고객사는 그렇게 안 읽었다. 전화 끊는다. 김차장이 본다. 말 안 해도 안다. "고객사가 원한다고 하셨죠?" 안 하면 프로젝트가 터진다. 터지면 영업 책임이다. '범위 관리 못 했다'고 찍힌다. 하면 PM팀이 죽는다. 야근 2달 각이다. 마진은 마이너스다. 둘 다 지옥이다. 근데 선택해야 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협상이 아닌 설득의 시간 "김차장, 일단 듣자." 나는 말한다. PM 입장도 이해한다. 근데 큰 그림을 봐야 한다. "이 고객사가 누군지 알지?" "금융권 빅5 중 하나다." "이번 프로젝트 레퍼런스 하나면 내년 수주 3건 더 있다." 김차장 표정이 안 풀린다. 당연하다. PM한테는 '지금' 프로젝트가 전부니까. "내년 프로젝트는 제대로 견적 받겠습니다." "이번 건은 전략적 투자로 갑시다." "마진 안 나도 레퍼런스 값어치가 있습니다." 전략적 투자. 영업이 자주 쓰는 말이다. PM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기도 하다. "부장님, 작년에도 그러셨습니다." "재작년에도 전략적 투자였습니다." "전략적 투자만 5개째입니다." 할 말이 없다. 사실이니까. 매번 '이번만'이라고 했다. "이번엔 진짜 다르다." "고객사 IT예산 내년에 30% 늘어난다." "우리가 먼저 들어가야 한다." 김차장이 한숨 쉰다. 포기하는 한숨이다. 져주는 한숨이다. "조건 있습니다." PM이 제시하는 최소한의 선 김차장이 노트북을 다시 연다. 새 시트를 띄운다. 협상안이다. "모바일은 1차 출시 때 빼겠습니다." "2차 업그레이드 때 넣는 걸로 하죠." "고객사한테 '단계적 구축'이라고 설득하세요." 단계적 구축. 좋은 말이다. 실제론 '지금은 못 한다'는 뜻이지만. "API 연동은 2개만 하겠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고객사가 자체 개발하거나." "아니면 추가 계약 따로 하세요." 추가 계약. 고객사가 받아들일까. 어렵다. 근데 방법이 없다. "대시보드 커스터마이징은 3종으로 줄이겠습니다." "템플릿 기반으로 하면 공수 반으로 줍니다." "대신 고객사가 직접 수정 가능하게 툴 드리죠." 하나씩 깎는다. PM 입장에서 최소한이다. 이것도 야근 각인데. "이렇게 해도 추가 공수 1.2억입니다." "회사가 먹겠습니까, 고객사가 먹겠습니까?" 둘 다 안 먹는다. 결국 PM팀이 먹는다. 나도 안다. 김차장도 안다. "내가 본부장님한테 말씀드린다." "특별 예산 좀 받아볼게." "그리고 고객사한테는 내가 설득한다." 김차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믿는 건 아니다. 그냥 선택지가 없어서다. 영업의 숙제, 불가능의 영역 회의 끝났다. 김차장이 나간다. 나는 회의실에 남는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고객사 설득. 내부 예산 확보. 먼저 이전무한테 전화한다. "전무님, 리뷰 일정 관련해서요." "단계적 구축 방안 좀 협의하고 싶습니다." 단계적. 1차, 2차 나눠서. 모바일은 나중에. "왜요? 문제 있어요?" 바로 눈치챈다. 15년 고객사 관리한 사람이다. "아닙니다. 더 완성도 높이려고요." "1차는 코어 기능에 집중하고." "2차에서 확장 기능 완벽하게 하는 거죠." 거짓말은 아니다. 포장한 것뿐이다. 영업은 이런 거다. "흠... 임원들한테 뭐라고 하죠?" 이게 핵심이다. 이전무 고민은 상사 보고다. "대시보드 3종 먼저 보여드리시면 됩니다." "모바일은 UX 고도화 중이라고 하시고요." "2차 때 완벽한 버전 보여드리는 게 낫습니다." 이전무가 잠시 침묵한다. 계산하는 침묵이다. 본인 리스크 계산. "좋습니다. 그럼 2차는 언제죠?" "3개월 후 가능합니까?" 3개월. 김차장이랑 다시 싸워야 한다. 근데 일단 넘어갔다. "검토해보고 일정 드리겠습니다." 전화 끊는다. 첫 번째 고비 넘었다. 이제 본부장님이다. 1억 2천 예산 받아야 한다. 이게 더 어렵다. 내부 보고, 또 다른 전쟁 본부장 방 앞이다. 노크한다. "들어오세요." 본부장님이 모니터 보고 있다. 실적 대시보드다. 우리 팀 수치가 보인다. "무슨 일이에요?" 앉는다. 보고 시작한다.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A은행 프로젝트 범위 이슈입니다." "PM팀 검토 결과 추가 공수 발생했습니다." "1억 2천 수준입니다." 본부장님 표정이 굳는다. 예상했다. 숫자 나오면 다들 그렇다. "왜 수주할 때 몰랐어요?" 이 질문이 제일 무섭다. 대답 없다. 변명밖에 안 된다. "고객사 요구사항이 제안 단계에서."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이다. 알고도 넘어간 거다. 본부장님도 안다. "경쟁사 상황은?" "2개 업체 중 우리가 수주했죠?" "단가 경쟁 어땠어요?" 본부장님은 안다. 영업 프로세스를 안다. 단가 맞추려고 범위 줄인 거. "치열했습니다." "근데 이 고객사는 전략적으로." "레퍼런스 가치가 큽니다." 전략적. 또 이 단어다. 본부장님이 웃는다. 비웃는 거다. "김부장, 올해 전략적 프로젝트가 몇 개죠?" "작년에도 전략적이었고." "매년 전략적이면 그게 전략인가요?" 할 말 없다. 정곡이다. 근데 선택지가 없다. "내년 A은행 예산 30% 증가합니다." "차세대 2단계 예정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레퍼런스 만들면." "200억 프로젝트 선점 가능합니다." 200억. 이 숫자가 중요하다. 본부장님 표정이 바뀐다. "확실해요?" "A은행 IT담당 임원이 확답했어요?" 확답. 그런 거 없다. 다 추측이다. "아직 공식 확답은." "근데 이전무 통해서 들었습니다." "임원들이 차세대 2단계 준비 중입니다." 본부장님이 생각한다. 길게 생각한다. 이게 영업 판단이다. "1억 2천, 우리가 먹는 겁니까?" "고객사한테 추가 받을 수 있습니까?" 둘 다 아니다. PM팀이 먹는다. 야근으로, 주말 근무로. "일단 우리가 흡수하겠습니다." "2차 업그레이드 때 비용 받는 걸로." "고객사 설득 중입니다." 본부장님이 한숨 쉰다. 승인하는 한숨이다. 근데 조건이 붙는다. "이번만입니다." "내년 A은행 프로젝트 못 따오면." "김부장, 책임집니다." 책임. 무슨 책임인지 안다. 인사고과, 승진, 최악은 팀 이동. "알겠습니다." 나온다. 본부장 방 나온다. 복도가 길다. 져야 이기는 게임 사무실로 돌아온다. 김차장한테 메시지 보낸다. "예산 확보했습니다. 진행하시죠." 답장 온다. "확인했습니다." 느낌표 하나 없다. 기쁘지 않다. 당연하다. PM팀 야근 2달 확정이니까. 내 책임이다. 영업이 판 구멍. PM이 메운다. 15년 하면서 늘 이랬다. '이번만'이라고 하면서. 매년 반복했다. 김차장 같은 PM 몇 명 태웠다. 다들 지쳐서 나갔다. 다른 회사로, 다른 업종으로. '영업이 왜 이래요?' '수주만 하면 끝입니까?' '저희가 청소부입니까?' 다 들었다. 반박 못 했다. 사실이니까. 근데 이게 SI다. 수주 못 하면 회사가 없다. 프로젝트 없으면 다 백수다. 범위 지키면 수주 못 한다. 경쟁사가 '다 된다'고 하니까. 고객사는 그쪽 선택한다. 그럼 우리도 '다 된다'고 한다. 수주하고 나중에 해결한다. PM팀 설득하고, 본부장 설득하고. 이게 영업이다. 져야 이기는 게임. PM한테 지고, 본부장한테 지고. 근데 고객사한테는 이긴다. 프로젝트 따온다. 회사는 돌아간다. 오후 6시, 다음 전쟁 준비 시계 본다. 오후 6시. 3시간 싸웠다. 메일 확인한다. 새 RFP 왔다. B증권, 200억 규모. 열어본다. 요구사항 쭉 본다. 벌써 보인다. '이거 범위 애매하네.' '나중에 문제 되겠네.' 'PM이랑 또 싸우겠네.' 근데 해야 한다. 안 하면 경쟁사가 한다. 그럼 우리 실적 없다. 전화 온다. PM 박과장이다. 신규 프로젝트 담당자. "부장님, B증권 건 보셨죠?" "범위 검토 좀 하고 싶은데요." "내일 미팅 가능하십니까?" 또 시작이다. 범위 협의. 영업과 PM의 전쟁. "그래요, 내일 10시." 전화 끊는다. 내일도 싸운다. 모레도 싸울 거다. 이게 내 일이다. 15년 했다. 앞으로도 할 거다. PM한테 미안하다. 근데 선택지가 없다. 이게 SI 영업이다.져야 이기는 게임. 오늘도 졌다. 내일도 질 거다. 근데 프로젝트는 따온다.

제안서 최종 검토 때 밤 11시, 아직도 틀린 부분을 찾는 이유

제안서 최종 검토 때 밤 11시, 아직도 틀린 부분을 찾는 이유

제안서 최종 검토 때 밤 11시, 아직도 틀린 부분을 찾는 이유 11시 23분 사무실에 나랑 PM 한 명만 남았다. 나머지는 다 보냈다. 내일 아침에 최종본 출력하면 된다고. 근데 나는 못 간다. 제안서를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 세 번째다. 370페이지. A4 용지로 치면 500장 넘는다.커피 식었다. 마신다. 쓰다. PM이 묻는다. "부장님, 괜찮으시죠?" 괜찮을 리가 없다. 이 제안서 금액이 850억이다. 작년 11월 작년에 비슷한 프로젝트 수주했다. 680억짜리. 우리가 땄다. 제안서 제출하고 발표까지 완벽했다. 근데 계약서 검토 단계에서 터졌다. 제안서에 명시된 투입 인력 수가 우리 원가 계산서랑 안 맞았다. 제안서: 180명 원가표: 165명 15명 차이. 고객사에서 지적했다. "제안서대로 180명 투입하시죠?" 우리는 165명 기준으로 단가 뽑았다. 180명으로 하면 마진이 3% 날아간다. 20억 손해. 결국 우리가 손해 보고 계약했다. 그때 제안서 총괄한 게 나였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앉아 있다. 12시 18분 2장. 프로젝트 개요. "고객사의 디지털 혁신을 통한..." 문제없다. 5장. 사업 범위. "총 18개 서브시스템 재구축..." 숫자 확인한다. 별첨 A랑 대조한다. 맞다. 23장. 투입 인력 계획. 여기다. 여기서 실수 나온다.PM 급 12명. 확인. 선임급 45명. 확인. 중급 78명. 확인. 초급 34명. 확인. 합계 169명. 원가표 꺼낸다. 169명. 맞다. 근데 믿을 수가 없다. 다시 센다. 표를 하나하나. 12 + 45 + 78 + 34 = 169명. 맞다. 그래도 불안하다. 1시 05분 PM이 졸고 있다. 깨운다. "미안한데, 34페이지 인력 투입 일정표 좀 봐." "네? 아 네." 같이 확인한다. 1단계: 67명 2단계: 102명 3단계: 89명 4단계: 45명 최대 투입 인력이 102명이다. 총 투입 인력 169명이랑 다른 개념이다. 근데 고객사는 이거 헷갈려한다. 작년에도 이거 때문에 한 번 싸웠다. "제안서에 169명이라고 했는데 왜 102명만 들어왔냐"고. 설명했다. 중복 계산 아니라고. 단계별 최대 투입 인력이라고. 이해 못 한다. 그래서 이번엔 주석 달았다. "* 총 투입 인력(169명)은 전체 사업 기간 동안의 누적 인력이며, 단계별 최대 투입 인력(102명)과는 상이함" 이 한 줄 때문에 30분 썼다. 근데 이 한 줄이 20억을 지킨다. 1시 47분 67페이지. 기술 아키텍처. 여기는 아키텍트가 쓴 부분이다. 나는 기술 잘 모른다. 15년 영업했다. 근데 읽는다. "Microservices Architecture 기반..." "Kubernetes Orchestration..." "API Gateway 구성..." 무슨 소린지 모른다. 근데 읽는다. 왜냐면 고객사 CIO가 물어보기 때문이다. "이 부분 좀 설명해주실래요?" 그때 내가 대답 못 하면 신뢰 깨진다.그래서 지금 외운다. Microservices는 시스템을 작게 쪼갠 거다. Kubernetes는 그걸 관리하는 거다. API Gateway는... 뭐 중간에서 교통정리하는 거다. 대충 이 정도면 CIO 질문에 버틴다. 디테일은 옆에 아키텍트가 설명한다. 근데 나는 흐름은 알아야 한다. 2시 20분 PM 완전히 잤다. 깨우지 않는다. 얘는 내일 새벽에 제안서 출력해야 한다. 나 혼자 읽는다. 158페이지. 사업 수행 일정. 간트 차트가 있다. 24개월. 1단계부터 4단계까지. 여기서 고객사가 집중하는 건 중간 산출물이다. "3개월 차에 뭐 나오죠?" "6개월 차엔요?" 제안서에 다 써놨다. 근데 이게 우리 내부 PM 계획이랑 맞아야 한다. 안 맞으면 나중에 지옥이다. 고객사: "제안서에 3개월 차에 분석 보고서 준다고 했잖아요." 우리: "아 그게... 일정이..." 이러면 끝이다. 그래서 확인한다. 제안서 일정표 - PM 내부 계획서 - 원가 산정 기준 세 개가 다 맞아야 한다. 하나씩 대조한다. 맞다. 다행이다. 근데 안심 안 된다. 2시 55분 이제 부록이다. 회사 소개, 유사 실적, 기술 인증서, 참여 인력 이력서. 여기는 보통 안 본다. 근데 나는 본다. 작년에 여기서도 실수 났다. 참여 인력 이력서에 PM으로 들어간 사람. 실제로는 그 프로젝트 못 한다. 다른 프로젝트 투입됐다. 근데 제안서엔 이름 올라갔다. 고객사가 킥오프 미팅 때 물었다. "김 상무님은 언제 오시나요?" "...김 상무는 다른 프로젝트가 있어서..." 신뢰 무너졌다. 그 프로젝트 3개월 동안 난리였다. 그래서 지금 확인한다. 참여 인력 12명. 한 명씩 확인한다. 인사팀한테 받은 투입 가능 인력 리스트랑 대조한다. 다 맞다. 근데 또 불안하다. 내일 아침에 인사팀한테 전화한다. 한 번 더 확인한다. 3시 10분 다 봤다. 370페이지. 3시간 걸렸다. 오류 발견 못 했다. 다행이다. 아니다. 불안하다. 내가 못 찾은 걸 수도 있다. 커피 한 잔 더 탄다. PM 깬다. "야, 일어나. 같이 한 번만 더 보자." "네? 부장님 다 보신 거 아니에요?" "나 혼자 보면 안 돼. 너도 봐야 돼." "...네." 둘이서 또 본다. 핵심 부분만. 인력, 일정, 금액. 30분 걸렸다. 문제없다. "간다. 너도 가." "네. 고생하셨습니다." PM 먼저 보낸다. 나는 제안서 파일을 USB에 복사한다. 메일로도 나한테 보낸다. 출력본이 문제 생기면 이걸로 다시 뽑는다. 3시 40분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차에 탄다. 시동 건다. 집까지 40분. 4시 반에 도착한다. 7시에 다시 나와야 한다. 2시간 반 잘 수 있다. 근데 못 잔다. 알람 맞춰놔도 30분마다 깬다. 제안서 생각 때문에. "혹시 뭐 빠뜨린 거 없나" "숫자 계산 틀린 거 없나" "고객사 질문에 답 못 하면 어쩌나" 이게 15년째다. 왜 이러나 850억이다. 우리 회사 올해 목표가 3500억이다. 이 프로젝트 하나가 4분의 1이다. 이거 날아가면 우리 본부 실적 끝이다. 내 인센티브도 끝이다. 근데 그것보다. 제안서 하나 잘못 써서 프로젝트 날리면. 15년 쌓은 신뢰가 한 번에 무너진다. "SI영업부 박 부장? 아, 그 사람 제안서 엉망으로 써서..." 이렇게 소문난다. 금융권 좁다. 다 안다. 그럼 다음 프로젝트도 못 딴다. 그래서 본다. 밤 11시에도. 새벽 3시에도. 제안서 한 글자 한 글자. 숫자 하나하나. 이게 내 15년이다.내일 아침 8시, 제안서 제출한다. 그때까지는 못 쉰다.

오늘 회의 일정이 달라졌다, 09:00에 급 소집된 이유

오늘 회의 일정이 달라졌다, 09:00에 급 소집된 이유

아침 9시 긴급 소집 출근했다. 8시 55분. 주차장에서 핸드폰 켰더니 메일 10통. 제목에 전부 '긴급'이 붙어 있다. 본부장 메일이 제일 위에. "9시 30분 전원 집합, 회의실 B" 이유는 안 썼다. 안 좋은 신호다. 커피 뽑을 시간도 없다. 엘리베이터에서 PM팀 차장이랑 마주쳤다. "뭔 일이에요?" "모르겠어. 근데 분위기 심상찮아." 책상에 가방 던지고 PC 켰다. 메일함 다시 확인. 사내 공지 하나 더 왔다. "금일 오전 경영 현안 회의 소집" 경영 현안. 이 단어 나오면 십중팔구 나쁜 뉴스다.경쟁사 수주 뉴스 회의실 들어갔다. 본부장, 상무, 각 팀장 전부 모였다. 표정들이 다 굳어 있다. 스크린에 뉴스 기사 하나 띄워져 있다. "○○시스템즈, △△은행 차세대 시스템 수주" 추정 금액 800억. 우리가 6개월 동안 준비한 프로젝트다. 작년 11월부터 고객사 임원 미팅 돌았다. 제안서만 3번 수정했다. PM 인력 배치까지 다 해놨었다. 본부장이 입을 연다. "다들 봤지? 어제 저녁에 최종 결정 났대." 회의실이 조용해진다. "우리 제안가는 750억이었어. 걔네는 680억." "기술 점수는 우리가 높았는데, 가격에서 밀렸어." 누군가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상무가 말한다. "1분기 실적 목표가 1500억인데, 이거 날아가면 700억이야." "남은 파이프라인으로 메꿀 수 있어?" 내가 담당하는 금융권 쪽 파이프라인을 떠올린다. ○○증권 클라우드 전환, 300억. □□카드 빅데이터 플랫폼, 200억. 둘 다 경쟁 PT 전이다. 확정 아니다. "어렵습니다. 확정된 건 200억밖에 없습니다." 본부장 표정이 더 굳는다.전략 재수립 회의가 2시간 넘게 갔다. 각 팀별로 파이프라인 재점검. 수주 가능성 있는 프로젝트 전부 리스트업. 금융권 팀, 공공 팀, 제조 팀 순서로 발표. 나는 금융권 담당이니까 제일 먼저 불려 나갔다. "현재 추진 중인 건 5개입니다." "이 중 2분기 안에 수주 가능한 건 3개." "총 추정 금액 650억." 상무가 묻는다. "확률은?" "○○증권은 60%, □□카드는 40%, ××생명은 30%입니다." 본부장이 계산기를 두드린다. "기댓값으로 치면 300억 정도네." "이걸로는 부족해. 신규 발굴 어때?" 신규 발굴. 지금 시점에서 신규 프로젝트 찾아서 수주까지 가려면 최소 6개월. 2분기는 이미 글렀다는 뜻이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2분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발굴해도 3분기나 되겠습니다." 회의실이 또 조용해진다. 누군가 물 마시는 소리만 들린다. 본부장이 말한다. "일단 기존 파이프라인에 올인하자." "특히 확률 높은 프로젝트는 무조건 따내야 해." "제안가 조정도 검토하고." 제안가 조정. 말이 좋아 조정이지 결국 단가 깎는다는 얘기다. 마진 줄이고 인력 투입 늘리고. 수주는 하는데 남는 게 없는 구조.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는데 속은 답답하다. 경쟁사 전략 분석 회의 끝나고 자리로 돌아왔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책상에 앉아서 경쟁사 보도자료 찾아봤다. ○○시스템즈 홈페이지에 자랑스럽게 올라와 있다. "디지털 전환 선도 기업으로서..." 읽다가 꺼버렸다. 중요한 건 그들이 어떻게 수주했냐다. 단가만 낮춘 게 아닐 거다. 분명 고객사 내부에 누가 있었을 거다. 전화 몇 통 돌렸다. 업계 아는 사람들한테. "야, △△은행 프로젝트 어떻게 된 거야?" 한 친구가 귀띔해준다. "CIO가 바뀌었잖아. 신임 CIO가 ○○시스템즈랑 전 직장에서 같이 일했대." "아, 그래서..." 결국 인맥이다. 기술이고 뭐고 결정권자가 누구랑 친하냐가 제일 중요하다. SI 영업 15년 하면서 배운 진리. 우리도 그 정보 미리 알았으면 전략을 바꿨을 텐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팀원들 얼굴 오후 3시쯤 팀원들 불러 모았다. 내 밑에 대리 2명, 과장 1명. 다들 아침 회의 분위기 알고 있다. "일단 상황은 이래." "△△은행 건은 날아갔어. 경쟁사 먹었어." "그래서 우리 목표가 더 높아졌어." 대리 하나가 묻는다. "그럼 ○○증권은 무조건 따내야 하는 거네요?" "그렇지. 무조건." 과장이 말한다. "근데 부장님, 경쟁사가 또 저가로 들어오면요?" "그때는... 우리도 가격 맞춰야지." 팀원들 표정이 어둡다. 저가 수주하면 프로젝트 하면서 고생한다는 거 다 안다. 인력은 부족하고 일정은 빡빡하고. "일단 최선을 다하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야." "제안서 품질 최대한 높이고, 고객사 미팅 더 자주 잡고." 대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알겠습니다." 팀원들 돌려보내고 혼자 앉아 있다. 이 친구들 실적 못 내면 연봉 협상 때 타격 받는다. 나도 마찬가지고. 15년차 부장이 이런 상황 수습 못 하면 임원은 물 건너간다. 알면서도 답이 안 보인다. 저녁 보고 7시에 본부장실 들어갔다. 오늘 회의 후속 조치 보고. "○○증권 PT 일정 당겼습니다." "다음 주 화요일로." "제안서는 이번 주 안에 최종 마무리하겠습니다."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기술 제안은 괜찮아?" "PM팀이랑 협의해서 아키텍처 고도화했습니다." "클라우드 네이티브 구조로 제안하고, AI 기반 이상 탐지 시스템 추가했습니다." "가격은?" "일단 280억으로 제안하려고 합니다." "우리 원가가 250억 정도니까 마진 10% 정도 나옵니다." 본부장이 잠시 생각한다. "10%면 너무 적은데. 경쟁사가 더 낮게 들어오면?" "그때는... 260억까지 내릴 수 있습니다." "마진 4%로 줄어들지만 수주는 가능할 겁니다." "알았어. 일단 280억으로 가되, 협상 여지는 남겨둬." "네." 나오면서 한숨 나온다. 마진 4%면 거의 본전이다. 프로젝트 하다가 변수 하나만 터져도 적자다. 그래도 수주는 해야 한다. 실적 없으면 더 큰 문제니까. 퇴근길 생각 9시 반에 퇴근했다. 차 몰면서 오늘 하루를 돌아본다. 아침에 긴급 회의 소집 메일 받았을 때부터 뭔가 꼬였다. 경쟁사 수주 뉴스 보고 본부 전체가 패닉. 파이프라인 재점검하고 전략 수정하고. 팀원들한테 압박 전달하고. SI 영업이 원래 이렇긴 하다. 수주 못 하면 회사가 안 돌아간다. 대형 프로젝트 하나가 분기 실적 좌우한다. 경쟁사 동향에 일희일비하고. 15년 하면서 이런 날이 몇 번이었나. 세어보면 손가락 모자랄 것 같다. 그래도 계속 한다. 집에 가면 아내랑 애들 있고. 월급 나오고 보너스 나오고. 임원 되면 스톡옵션도 나오고. 신호등에 걸렸다. 옆 차선 보니까 택시 기사가 하품하고 있다. 저 사람도 오늘 하루 고생했겠지. 다시 출발한다. 집까지 30분. 내일 아침 되면 또 출근한다. 메일함 열고 일정 확인하고. 고객사 미팅 가고 제안서 검토하고. 그게 내 일이다. 15년째 하는 일.내일은 ○○증권 실무자 미팅이다. 준비 잘해야지.

15년 SI 영업했는데, 임원 될 가능성은 0%인가

15년 SI 영업했는데, 임원 될 가능성은 0%인가

15년 차, 부장 15년 했다. SI 영업 15년. 부장이다. 연봉 9500만원. 인센티브 포함하면 억 넘는다. 대형 프로젝트 수주하면 몇천 더 받는다. 근데 임원은 못 될 것 같다. 아니, 확신한다. 0%다. 오늘도 출근하면서 생각했다. "나 여기서 끝인가?" 엘리베이터에서 상무 한 분을 봤다.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분이 말했다. "어, 부장. 요새 수주 어때?" "노력 중입니다." "그래, 화이팅." 끝이다. 그게 전부다.임원 되는 사람들 우리 회사 임원 되는 패턴이 있다. 첫째, 창업 멤버 자녀. 둘째, 대형 프로젝트 10개 이상 수주한 사람. 셋째, 정말 운 좋은 사람. 나는 셋 다 아니다. 창업 멤버 자녀는 당연히 아니다. 부모님은 공무원이셨다. 대형 프로젝트 10개? 나는 7개 수주했다. 15년 동안. 각각 300억, 250억, 180억, 150억, 140억, 120억, 100억. 합치면 1240억이다. 나쁘지 않다. 근데 임원 된 사람들 보면 2000억은 기본이다. 한 명은 차세대 프로젝트 하나로 500억 수주했다. 그걸로 상무 됐다. 나는? 100억짜리 7개 쪼개서 모았다. 숫자는 비슷해도 급이 다르다. 이게 현실이다. 운은 더 웃긴다. 작년에 상무 된 선배 있다. 프로젝트 3개 수주했다. 금액은 내 절반이다. 근데 그 선배, 고객사 부사장이랑 대학 동창이다. 그 라인으로 계속 프로젝트 따냈다. 그게 운이다. 나는? 고객사 라인 만들려고 15년 동안 술 처먹었다. 간은 부었고, 인맥은 넓어졌다. 근데 그게 임원 티켓은 아니다. 오늘 회의 오전에 영업본부 전략 회의 있었다. 본부장이 말했다. "올해 목표 달성률 78%입니다. 4분기에 만회해야 합니다." 다들 고개 끄덕인다. 나도 끄덕였다. "각 부장님들, 파이프라인 점검 부탁드립니다." 내 차례 왔다. "금융권 쪽은 현재 5개 프로젝트 제안 중입니다. 총 450억 규모입니다." "수주 가능성은?" "2개는 80% 이상입니다. 나머지는 경쟁 상황 보면서..." "알겠습니다. 꼭 따세요." "예." 회의 끝나고 복도에서 본부장이랑 마주쳤다. "부장, 요새 고생 많으시죠?" "괜찮습니다." "올해 실적 좋으면 임원 추천 고려해볼게요." "감사합니다." 고려해볼게요. 이 말 5년째 듣는다. 작년에도 들었다. 재작년에도 들었다. 근데 임원 추천은 안 왔다. 올해도 안 올 거다. 왜? 자리가 없다. 우리 회사 상무 정원 20명이다. 현재 19명이다. 한 자리 남았다. 근데 그 자리는 이미 정해졌다. 클라우드 사업부 부장이 갈 거다. 걔는 400억짜리 프로젝트 수주했다. 나는? 줄 서 있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숫자 계산 오늘 점심 먹으면서 계산해봤다. 내 연봉 9500만원. 세후 7천 정도. 인센티브 평균 2천. 합치면 연간 9천만원 가져간다. 상무 되면 연봉 1억 5천이다. 인센티브 포함하면 2억. 차이가 1억이다. 1억이 크다. 아파트 한 채 값이다. 근데 상무 되려면? 최소 3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아니, 5년일 수도 있다. 아니, 평생 안 될 수도 있다. 그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부장으로 계속 일하면서 인센티브 최대한 받는 거다. 올해 목표는 600억 수주다. 현재 280억 수주했다. 남은 건 320억이다. 4분기에 다 따야 한다. 따면 인센티브 3천 나온다. 못 따면 1천도 없다. 이게 내 현실이다. 임원 꿈꾸기보다 현실적이다. 후배들 후배 부장이 한 명 있다. 나보다 5년 후배다. 걘 나보다 잘 나간다. 작년에 500억 프로젝트 수주했다. 오늘 복도에서 마주쳤다. "형, 요새 어때요?" "그냥. 너는?" "저는 이번에 공공 쪽 대형 건 하나 노리고 있어요." "규모는?" "800억이요." "크네." "네, 이거 따면 상무 될 것 같아요." "그래, 잘해봐." "고맙습니다, 형." 걔는 상무 될 거다. 확신한다. 나이도 어리고, 실적도 좋고, 타이밍도 맞다. 나는? 타이밍 놓쳤다. 10년 전에 500억짜리 프로젝트 하나 따야 했다. 근데 그땐 그런 프로젝트가 없었다. 시장이 달랐다. 지금은? 대형 프로젝트 많다. 클라우드, DX, AI. 근데 그건 후배들 차지다. 나는 이미 금융권에 묶여 있다. 금융권은 안정적이다. 매년 100억씩은 나온다. 근데 임원 되려면? 한 방이 필요하다. 500억짜리 한 방. 그게 없다. 그래서 끝이다.아내한테 말했다 어제 집에 들어갔다. 밤 10시였다. 아내가 물었다. "임원 승진 이야기 들었어요?" "응." "언제쯤 될 것 같아요?" "모르겠어." "올해는요?" "아니." "그럼 내년은요?" "그것도 모르겠어. 아마 안 될 거야." "왜요? 당신 15년 했잖아요." "15년 했다고 다 되는 거 아니야." "..." 아내가 조용해졌다. 뭐라 말 안 했다. 나도 말 안 했다. 설명해봤자 이해 못 한다. 아내는 SI 업계 모른다. 회사 정치 모른다. 자리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지 모른다. 그냥 남편이 15년 일했으니까 승진하겠거니 생각한다. 근데 현실은 다르다. 15년은 기본이다. 20년 해도 부장인 사람 많다. 25년 해도 안 되는 사람 있다. 나는 아마 그쪽일 거다. 점심 메뉴 오늘 점심은 된장찌개였다. PM 한 명이랑 같이 먹었다. 30대 중반, 경력 8년. 걔가 물었다. "부장님, 임원 되시면 뭐 하고 싶으세요?" "글쎄." "저는 나중에 임원 되면 해외 출장 많이 가고 싶어요." "그래? 임원 되면 출장 더 많아." "그래도 멋있잖아요." "멋있긴. 피곤해." "부장님은 임원 안 되고 싶으세요?" "되면 좋지. 근데 안 될 것 같아." "왜요? 부장님 실적 좋으시잖아요." "실적만으로 되는 게 아니야." "그럼 뭐가 필요한데요?" "운이랑 타이밍. 그리고 라인." "아..." 걔도 이해했다. 표정이 굳었다. 8년 차면 이제 알 만하다.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도 8년 차 때 알았다. 근데 인정 안 했다. "나는 실적으로 승부하면 돼." 그렇게 생각했다. 15년 하고 나니까 안다. 실적은 기본이다. 그 위에 정치가 있고, 라인이 있고, 운이 있다. 나는 정치 못 한다. 라인도 없다. 운도 없다. 그래서 부장이다. 그리고 계속 부장일 거다. 경쟁사 동기 대학 동기 한 명이 경쟁사에 있다. 걔도 SI 영업이다. 나랑 같은 15년 차다. 작년에 전무 됐다. 우리 회사로 치면 상무 위다. 한 달 전에 술 먹었다. "너 어떻게 전무 됐어?" "운 좋았지 뭐." "무슨 운?" "회장님이랑 같은 고향이야." "그게 운이야?" "응. 그거 하나로 10년 밀렸어. 그게 운이지." "..." 걔는 실적 나보다 별로다. 프로젝트 5개 수주했다. 총 700억이다. 나는 1240억이다. 근데 걔는 전무고, 나는 부장이다. 차이는? 회장이랑 같은 고향. 이게 SI 영업이다. 이게 대기업이다. 실력보다 라인이다. 실적보다 인맥이다. 나는 그게 없다. 그래서 여기까지다. 딸이 물었다 지난주 주말에 딸이 물었다. 중학교 2학년이다. "아빠, 회사에서 높은 사람이에요?" "응, 부장이야." "부장 위에는 뭐가 있어요?" "상무, 전무, 부사장, 사장." "아빠는 언제 상무 돼요?" "모르겠어." "왜요?" "어려워서." "아빠 일 열심히 하잖아요."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야." "그럼 뭐가 필요한데요?" "운." 딸이 이해 못 하는 표情이었다. 나도 20년 전에는 이해 못 했다. "열심히 하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근데 아니다. 열심히는 기본이다. 거기에 운이랑 타이밍이랑 정치가 더해져야 한다. 나는 열심히만 했다. 나머지는 못 했다. 그래서 딸한테 상무 된다고 말 못 한다. 거짓말하기 싫다. 퇴근길 오늘 퇴근은 9시였다. 차 타고 집에 가면서 생각했다. "나 15년 동안 뭐 한 거지?" 프로젝트 7개 수주했다. 1240억 매출 올렸다. 회사 이익에 기여했다. 부서 실적 만들었다. 근데 임원은 못 된다. 왜? 자리가 없다. 라인이 없다. 타이밍 놓쳤다. 그럼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아니다. 잘못한 거 없다. 그냥 이게 현실이다. 대기업 영업이 이렇다. 부장까지는 실력으로 온다. 그 위는 운이다. 나는 실력 있다. 근데 운은 없다. 그래서 부장이다. 앞으로도 부장일 거다. 받아들였다. 오늘 퇴근길에. "나는 임원 안 된다. 그리고 괜찮다." 연봉 9500만원이다. 인센티브 받으면 억 넘는다. 한국에서 상위 5% 안에 든다. 못 사는 거 아니다. 딸 대학 보낼 수 있다. 아파트도 있다. 차도 있다. 임원 못 돼도 산다. 그렇게 살 거다. 내일 일정 내일 오전 10시에 고객사 미팅 있다. 은행 IT 담당 임원이랑 만난다. 클라우드 전환 프로젝트 제안한다. 350억짜리다. 오후에는 내부 보고 있다. 본부장한테 보고한다. "4분기 수주 목표 달성 방안" 보고한다. 저녁에는 PM들이랑 회식이다. 삼겹살 먹는다. 평범한 하루다. 15년 동안 반복한 하루다. 임원 되든 안 되든, 내일도 이렇게 산다. 프로젝트 수주하고, 보고하고, 회식한다. 이게 SI 영업이다. 이게 내 인생이다. 나쁘지 않다. 임원 못 돼도 나쁘지 않다. 그냥 0%를 받아들이면 된다. 그리고 오늘 주어진 일 하면 된다.임원은 꿈이었다. 이제는 현실을 산다. 부장으로.

고객사 정치에서 뒈진다는 것, 수주 경험으로 배운 것들

고객사 정치에서 뒈진다는 것, 수주 경험으로 배운 것들

고객사 정치에서 뒈진다는 것, 수주 경험으로 배운 것들 280억짜리 프로젝트가 증발하는 순간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2024년 3월이었다. A금융 차세대 시스템 구축. 280억. 8개월 제안 준비. 우리가 우선협상대상자. CIO가 말했다. "프로젝트 잠시 보류합니다." 그게 끝이었다. 복도에서 만난 IT담당 임원이 작게 말했다. "부행장님이 반대하셔서요. CIO님이랑 경영 방향 달라서." 280억이 그렇게 날아갔다. 8개월이 허공으로.고객사 정치라는 게임 SI 영업 15년 하면서 배운 거. 기술은 20%, 정치가 80%. 아무리 좋은 제안서도 임원진이 싸우면 끝이다. 경우의 수는 이렇다: CIO가 추진하는데 CFO가 반대: 예산 타당성 문제 제기. 프로젝트 6개월 지연 또는 축소. CIO가 추진하는데 업무부서 임원이 반대: 현업 니즈 반영 안 됐다고 회의 때마다 딴지. 결국 재검토. CIO가 추진하는데 부행장급이 다른 방향 원함: 프로젝트 자체가 보류되거나 방향 180도 전환. 우리는? 그냥 외부 업체일 뿐. 누구 편 들면 나머지한테 찍힌다. 중립 지키려면 양쪽 다 불만족. 프로젝트는 표류. 첫 번째 실수: CIO 편만 든 거 2019년이었다. B은행 디지털 전환 프로젝트. CIO가 강력하게 추진했다. "클라우드 전면 전환합니다." 우리는 CIO 라인하고만 소통했다. 제안서도 CIO 의견 100% 반영. 그런데 IT기획팀장이 귀띔했다. "부행장님은 온프레미스 유지 원하세요." 나는 무시했다. CIO가 의사결정권자잖아. 결과? 경영회의에서 부행장이 반대. "클라우드 보안 검증 안 됐다." 프로젝트 무산. CIO는 3개월 뒤 자리에서 물러났다. 우리는? 그 은행에서 2년간 프로젝트 못 땄다. 부행장 라인 사람들이 다 기억하더라. "저 회사, CIO만 보는 애들이야." 두 번째 실수: 양쪽 다 맞춰주려다 망한 거 2021년. C카드사 차세대. 이번엔 교훈 얻어서 양쪽 다 챙겼다. CIO한테도 보고, CFO한테도 보고. 제안서에 CIO 원하는 최신 기술 넣고, CFO 원하는 비용절감안도 넣었다. 그런데 두 분이 원하는 게 정반대였다. CIO: "마이크로서비스 아키텍처로 전면 개편" CFO: "레거시 최대한 활용해서 비용 절감" 우리 제안서는 애매한 중간안이 됐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발표 때 CIO가 물었다. "이거 제대로 된 혁신 맞나요?" CFO가 물었다. "이 비용으로 효과가 나올까요?" 둘 다 못 만족시켰다. 경쟁사가 수주했다. 걔들은 CIO 쪽으로 명확하게 갔다. 세 번째 프로젝트에서 배운 것 2022년 가을. D증권 DX 프로젝트. 이번엔 달랐다. 첫 미팅 때부터 물었다. "이 프로젝트, 경영진 합의 어느 정도세요?" IT담당 임원이 솔직하게 말했다. "CIO는 추진, CFO는 유보적, 부사장은 관심 없음." 나는 제안 전에 3주를 썼다. CFO 설득에. CFO 만나서 물었다. "어떤 ROI 나와야 승인하시겠어요?" 구체적 숫자를 들었다. "3년 내 15% 비용절감." 제안서에 그 숫자를 박았다. 기술 내용보다 재무적 타당성을 앞에 뺐다. CIO한테는 따로 말했다. "기술적으론 최신으로 가되, 재무 논리 먼저 통과시키겠습니다." 발표 순서도 바꿨다. CFO 앞에서는 비용 먼저, CIO 앞에서는 기술 먼저. 결과? 수주했다. 145억.핵심은 "반대하는 사람"을 먼저 보는 것 15년 하면서 배운 결론. 찬성하는 사람은 신경 안 써도 된다. 어차피 찬성이니까. 반대하는 사람이 문제다. 얘가 막으면 프로젝트 없다. 그래서 나는 이제 첫 미팅 때 묻는다: "이 프로젝트, 누가 반대하세요?" "반대하는 이유가 뭐예요?" "그분 설득하려면 뭐가 필요해요?" 담당자들은 처음엔 당황한다. 그런 걸 묻는 영업이 없으니까. 근데 솔직하게 말해준다. 얘들도 프로젝트 성사시키고 싶으니까. 작년에 E은행 프로젝트. CIO가 추진하는데 IT운영본부장이 반대했다. 이유? "구축하면 운영 인력 30명 더 필요한데 우리 팀 증원 안 해줘요." 나는 제안서에 운영 자동화 방안 추가했다. "현재 인력으로 운영 가능한 설계." IT운영본부장 따로 만나서 보여줬다. "이렇게 하면 증원 없이 됩니다." 반대가 중립으로 바뀌었다. 프로젝트 통과했다. 줄 서지 않는다는 건 이런 것 "어느 쪽에 줄 서지 않으면서 생존" 이게 가능은 하다. 근데 방법이 다르다. 줄을 안 서는 게 아니라, 양쪽 줄을 다 이해하는 거다. CIO가 왜 추진하는지 안다. 디지털 전환 안 하면 경쟁사한테 밀린다. 임기 내 실적 필요하다. CFO가 왜 반대하는지도 안다. 예산 압박 심하다. 투자 대비 효과 불확실하다. 나는 양쪽 논리를 다 제안서에 넣는다. CIO한테는: "이 프로젝트로 시장 경쟁력 확보" CFO한테는: "3년 ROI 18%, 운영비 절감 연 12억" 양쪽이 다 자기 논리가 들어갔다고 느끼게. 중요한 건, 거짓말 안 하는 거다. 양쪽한테 다른 말 하면 나중에 걸린다. 같은 프로젝트인데 설명 방식만 다르게. CIO한테는 기술 혁신 강조, CFO한테는 재무 효과 강조.그래도 뒈지는 경우 솔직히 말하면, 완벽한 방법은 없다. 임원진 싸움이 격해지면 외부 업체는 그냥 튕긴다. 작년 F저축은행. CIO랑 경영기획본부장이 완전히 대립했다. CIO: "차세대 시스템 필수" 경영기획본부장: "지금 시스템으로 충분" 6개월 제안 준비했다. 양쪽 다 만났다. 제안서도 두 가지 시나리오로 만들었다. 결과? 프로젝트 자체가 취소됐다. 이사회에서 결론 못 내렸다. CIO는 2개월 뒤 사표 냈다. 우리는? 6개월치 인건비 날아갔다. 5명 투입했으니 약 1억. 이런 경우는 어쩔 수 없다. 초반에 알아채고 빠지는 게 답이다. 빠지는 타이밍 판단 요즘은 초반에 이거 체크한다: "이 프로젝트, 경영진 합의 수준이 어떠세요?" 답변이 애매하면 위험신호다. "아, 그건... 조율 중입니다." "CIO님은 확정인데 다른 분들은..." "일단 추진하고 승인은 나중에..." 이런 답 나오면 PM한테 말한다. "제안 규모 줄여. 리스크 크다." 풀로 투입 안 한다. 2~3명만 넣어서 가볍게 제안한다. 안 되면 빨리 손절한다. 계속 매달리면 더 큰 손해. 작년에 G카드사 프로젝트. 초반에 신호 이상했다. 담당 임원이 계속 말 바꿨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곧 결정됩니다." 3주 기다렸는데 답 없었다. 나는 철수했다. 경쟁사 2곳은 계속했다. 결국 프로젝트 무산됐다. 걔들은 4개월 날렸다. 생존의 기술 고객사 정치에서 생존하는 법. 정리하면 이거다: 1. 반대하는 사람을 먼저 파악한다. 찬성하는 사람 말고, 반대하는 사람. 얘 설득 못 하면 프로젝트 없다. 2. 반대 이유를 구체적으로 듣는다. "왜 반대하세요?" 직접 묻는다. 담당자 통해서라도 확인한다. 3. 제안서에 반대 의견 해소 방안을 넣는다. CFO가 비용 걱정하면 ROI 박는다. 운영팀이 인력 걱정하면 자동화 넣는다. 4. 양쪽한테 같은 내용, 다른 프레임으로 설명한다. 거짓말 아니다. 같은 프로젝트를 CIO 관점, CFO 관점으로 각각 설명하는 것. 5. 정치 싸움이 격하면 빨리 빠진다. CIO가 곧 물러날 것 같으면 투입 줄인다. 프로젝트 취소될 것 같으면 손절한다. 이렇게 해도 실패한다. 50%는 실패한다. 근데 이렇게 안 하면? 80% 실패한다. 그래도 계속하는 이유 피곤하다. 기술 영업이 아니라 정치 영업. 제안서보다 사람 보는 게 더 중요하다. 밤새 제안서 쓰는데 임원 한 명이 반대하면 끝이다. 그럼 왜 하냐고? 280억짜리 프로젝트 하나 수주하면 연봉이 두 배가 된다. 실패해도 다음 프로젝트가 있다. 이 바닥에서 15년 버텼으면 이제 알만큼 안다. 완벽한 방법은 없다. 확률을 높이는 방법만 있다. 고객사 정치는 피할 수 없다. 그럼 이해하고 대응한다. 줄 서지 않는 게 아니라, 양쪽 줄을 다 이해하는 것. 그게 내가 15년간 배운 생존법이다.280억 날렸지만 다음 프로젝트는 320억이었다. 그렇게 버틴다.